옥천(순창) 옹씨는 조선 인조7년 (서기 1629년)에 간행된 ‘기사보(己巳譜)’, 영조34년(서기 1758년)의 ‘무인보(戊寅譜)’ 등 오래된 보첩을 가지고 있어, 비록 인구수가 적은 희성인 옥천 옹씨이지만 다른 큰 가문이 실제로 보존하고 있는 구보의 년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최근 서기 1977년에 ‘정사보(丁巳譜)’가 간행되었고, 그 다음 족보 발간은 30년 간격이 좋다고 결정되어 서기 2000년부터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총회에 침석하지 않거니 연락이 없던 종원들의 연락처를 파악하고, 수단(收單)을 시작하였으나 예상한 가구수의 일부에 불과하여 족보 발간이 계속 미루어지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전문 업체에게 위탁하여 ‘갑진보(甲辰譜)’(서기 2024년)가 빛을 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추정되는 전체 세대 수 가운데 작지 않은 가구가 누락되었다고 짐작이 된다.
옥천옹씨의 연원은 “옥천옹씨 세보 - 기사보(己巳譜 : 1629년)에 따르면 고려조의 병부상서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鼻祖)로 하여 경성(慶星), 의성(義星), 명정(命廷) 등 여러 윗 조상들이 고려조의 교목지신(喬木之臣)으로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할 때에 불사이군하려고 성씨를 감추거나 숨어지내다가 초산(楚山, 지금의 정읍)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옥천(玉川, 지금의 淳昌)의 향리로 강속(降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모든 가승(家乘)과 종적(宗籍)이 失傳(실전)되었다고 하며, 이러다가 4세 옹몽진(邕夢辰)이 명종 6년, 1553년)에 친경별시(親耕別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555년 중시(重試)에, 1558년 중중시(重重試)에 급제하여 음성(陰城)과 청하(淸河) 운산(雲山) 황간(黃澗)의 현감을 역임하고 충청도사, 형조좌랑, 예조좌랑을 지내고 병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집안을 다시 세우면서 그 분의 증조이신 옹은(邕誾)을 1세로 하여 새로이 세계(世系)를 세우고 2세 식(湜), 3세 은운(殷雲), 4세 몽진(夢辰)으로 하여 이후에는 여러 대에 걸쳐 등과하고 영달하여 가세를 떨쳐 옥천(玉川)지방에서는 명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